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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이 사는 이야기

Kawa No Nagare No You Ni

이 음악을 제가 처음 알게된 것은 아들놈 태교음악으로 구입한 컴필레이션 CD에서

처음 듣고 오히려 제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어렵게 곡명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우울할 때면 인터넷에 게시되어 있는 이 곡의 가사를 주욱 읽어가면서

이 음악을 들으면 뭔지 모를 위안과 감동이 가슴 깊이 느껴졌습니다.

어제 오늘 많이 힘드실 분들께 이 음악으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시길 바라는 마음에

유투브에서 이 곡의 링크를 걸어봅니다.

모두들 힘내시길 바랍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川の流れのように - Kawa no nagare no you ni )

 

가사출처: http://blog.daum.net/astroboy/18282931(astroboy님 블로그)

 

川の流れのように
강물의 흐름처럼
 
 
知らず知らず步いて來た 細く長い この道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걸어왔네 길고도 좁은 이 길을

振り返れば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뒤돌아 보면 저만치 멀리고향이 보이고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地圖さえない それもまた人生
울퉁불퉁한 길과 굽어진 길 지도조차 없지만 그것 또한 인생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いくつも時代は過ぎて
아-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하게 어느새 세월은 흘렀네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空が黃昏に染まるだけ
아- 흐르는 강물처럼 끝도 없이 그저 하늘이 황혼에 물드는 것뿐 이라네

生きることは旅すること 終りのないこの道
살아간다는 건 길을 떠나는 것 끝도 없는 이 길을

愛する人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雨に降られてぬかるんだ道でも
사랑하는 이와 함께 꿈을 찾으며 비에 젖고 실패한 길이라도

いつかはまた 晴れる日が來るから
언젠가는 다시 비가 개인 내일이 올테니까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季節雪どけを待ち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변화하는 계절,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아- 흐르는 강물처럼 온화하게 이 몸을 맡기고 싶어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靑いせせらぎを聞きながら
아- 흐르는 강물처럼 언제까지라도 푸른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출처-위키백과

미소라 히바리(일본어: 美空 ひばり,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는 일본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여배우로,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이소고 구에서 태어났다. 세이카 학원(精華学園) 고등부를 졸업했으며, 본명은 가토 가즈에(일본어: 加藤 和枝 (かとう かずえ))다. 사후에 일본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전성기
데뷔 초기 모습1949년 7월에 《갓파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고, 1960년에 《애수 부두(哀愁波止場)》로 일본 레코드대상 가창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 당시 인기 영화 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1964년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직후인 1964년 12월에 텔레비전 드라마 《야와라》(柔)의 주제가로 사용된 동명의 곡을 발표해 크게 인기를 얻어 180만 매의 음반을 판매하고, 일본 레코드대상을 수상한다. 곧이어 발표한 1966년의 《가나시이사케(悲しい酒)》는 145만 매, 1967년의 《맛카나타이요(真赤な太陽)》는 140만 매를 판매해 크게 인기를 끌었다.

[편집] 후기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친어머니였던 가토 기미에(加藤喜美枝)가 사망하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우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인기 또한 전성기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떨어져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몸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22일에 후쿠오카 제생회 병원에 급하게 입원, “만성 간염 및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수 개월간 요양한 뒤 8월 3일에 퇴원하고, 10월에 신곡 《미다레가미(みだれ髪)》를 레코딩 해 복귀한다. 1988년 4월 11일에는 도쿄 돔에서 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복귀 콘서트 《불사조 ~ 날아라 새로운 하늘을 향해》를 가져 완전 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미 상한 몸으로 인해, 전국 공연을 가지던 도중에도 수차례 극비 입원 하는 등, 위험한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쇼와 천황이 죽으면서 연호가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 1월 11일에는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가와노나가레노요니(川の流れのように)》을 발표한다. 곧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하지만, 다시 입원과 일시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3월 21일에 자택에서 닛폰 방송에서의 라디오 특집 생방송 《미소라 히바리, 감동의 이 한 곡》을 방송하고 난 뒤 급격히 악화되어 준텐도 병원(順天堂病院)에 입원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 후 예정되었던 콘서트나 전국투어도 모두 중지되었다.

1989년 6월 13일에 결국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6월 24일에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편집] 사후
후쿠시마 현 이와키 시에 설치된
미소라 히바리 유영비(遺影碑)1989년 7월 4일에 일본 여성 최초로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이 후 7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명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요코하마 시 고난 구(港南区)에 안장되었다. 이 후에도 수년간 가요제의 특별상 등을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1993년에 교토 시에 “미소라 히바리관”이 개관하였으나, 이용자 수의 감소로 2006년 11월 30일에 폐관되었다. 폐관된 히바리관은 히바리 프로덕션에서 18억 엔에 매입하여, 2008년 봄에 다시 오픈한다고 발표되었다.[1]

2005년에 공개된 영화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복원되어 출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상영회 등이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최후의 곡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영어 위키백과에는 조금 흥미로운 사실이 보이는 군요.
Hibari Misora's ancestry is a matter of dispute. There are assertions that she was of ethnic Korean ancestry, and that she and her family held Korean passports
즉 히바리 미소라의 혈통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녀가 한국인 혈통이며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한국여권을 소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음...이 분이 어쩌면 한국인 혈통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